생명 평화의 길 - 정지창(생명평화아시아 이사장)
작성자 최고관리자

1. 성공과 실패, 희망과 절망의 연속이 내 삶의 본질.

 

산골 소년이 도시로 나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월급쟁이 생활을 하며 근근이 집 한 채 장만한 것이 과연 성공인가? 나는 가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해방 다음 해에 태어나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서울서 학교 다니던 막내 삼촌은 실종되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큰 형님은 부역 혐의로 죽을 고을 고비를 넘겨 가까스로 다시 교단에 섰다. 이런 집안 사정 때문인지 나는 ROTC 장교 출신인데도 2급 비밀 취급 인가는 받을 수 없었다. 1960년대 대학생 시절에는 은사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참고인으로 남산이라 불리는 중앙정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1970년대 기자 시절에는 북한 관련 외신기사를 그대로 번역하여 송고했다는 이유로 몇 차례 남산에 불려가기도 했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가까운 언론계 선배의 제작거부 사건에 연루되어 남영동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최근에 알고 보니 우리 5대조 할아버지는 동학에 가담하였다가 큰집에서 쫓겨나 보은의 산골로 피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같은 조상의 반골 기질 탓인지 평생 국가의 눈치를 보며 살 팔자였던 모양이다.

 

그 사이 차령산맥 비단 장막 둘러친 곳에라는 국민학교 교가처럼 아름답던 고향 마을은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고 어렸을 적 동무들과 물고기를 잡던 맑고 깨끗하던 강은 녹조로 뒤덮힌 커다란 호수가 되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시로 나갔고 어떤 이는 머나먼 남미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버렸다.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되고(‘시해라는 왕조시대의 용어가 암살이라는 평범한 공화국의 용어로 바뀌기까지 근40년이 걸렸다) 전두환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대학정원을 대폭 늘려준 덕분에 석사학위만 가지고도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어 이후 32년 동안 대학교수로서 부총장까지 지냈으니 이것을 출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학자로서는 김윤상 교수나 김익중 교수처럼 빛나는 저서나 연구논문을 남기지 못했고 그저 독일 희곡을 전공 삼아 브레히트를 소개하는 데 그쳤다.

 

교육자로서는 <민중문화론>, <문학과 현대사상> 등 교양과목을 개설하여 한 때 인기과목으로 많은 수강생이 몰려왔으나 2000년 이후에는 점차 인기가 떨어져 명목만 유지해 왔다.

 

1984년 영남대학으로 온 다음, 어쩌다가 학교 밖에서 예술마당 솔과 민족문학회(작가회의로 전환),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등의 진보적 문화운동 단체에 참여하며 자부심을 느꼈으나 이제는 이런 단체들도 모두 초기의 활력은 현저히 줄어들고 현상 유지에 급급한 형편이다. 정년퇴임 후에는 박근혜씨의 복귀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명예교수직도 거부당하고, 민예총을 비롯한 대외활동과 4대강반대운동, 세월호 조사 요구 탄원 서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2. 우리 삶의 질은 전보다 나아졌는가?

 

지금 시점에서 내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니, 처음에는 뭔가 그럴듯한 성취를 이룬 듯했지만 결국은 실패와 좌절로 끝을 맺은 것 같다. 가정적으로는 결혼하여 낳은 아들 둘이 이른바 서울의 일류대학을 나와 각각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아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자식농사에서는 주변 친지들보다 성공한 듯한데, 그렇지만 큰아들은 미국에 살고 있어 얼굴도 볼 수 없고, 손자들은 미국 사람이 되어버렸다. 둘째는 삼성에 다녔는데 직장 일에 쫓겨, 서울에 올라가도 얼굴을 볼 수 없고 30대에 대상포진에 걸릴 정도로 심신이 고달파서 결국 좀 작은 회사로 옮겼다. 첫째 며느리는 육아와 가사노동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면역이상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고, 둘째 며느리는 중학교 교사인데 두 아이의 육아와 학교 업무에 시달리다 이명증을 얻어 휴직 상태이다. 손자, 손녀들은 귀엽고 똑똑하지만 손자 둘 다 알러지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들, 손자들의 삶이 우리 세대들의 삶보다 나아진 것일까? 후손들이 과연 우리 세대보다 행복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나는 분단된 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우리의 맹세와 혁명공약, 국민교육헌장, 직속상관 관등성명 따위를 외우며 반공교육을 받아왔다. 인생의 대부분을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근혜 같은 부패한 독재자와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사기꾼들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살아왔다. 70 평생 가운데 그나마 민주정부에서 살아온 기간은 1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이에 4·19와 광주민중항쟁, 6월항쟁, 촛불혁명 등 몇 차례 민중혁명을 경험했으나 나라는 여전히 남북으로 분단된 채, 군사작전권은 외국에게 넘어가 있는 반식민지 상태이고, 냉전체제가 무너진지 오래인데도 전쟁상태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그 사이 보릿고개는 사라지고 국민소득은 높아졌고 초가집은 아파트로 바뀌고 누구나 자가용과 스마트폰을 가지게 되었으나, 아토피와 알러지 같은 병은 더 일상화되고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다. 평균 이상의 연봉을 받는 두 아들은 아직도 남의 집 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손자들은 학원 다니느라 마음대로 놀 틈이 없고 사시사철 미세먼지 때문에 집안에 갇혀 지낸다. 이것이 과연 진보이고 발전인가? 의식주와 학교교육, 교통·통신수단의 양적 증가와 비례하여 공기와 물, 음식은 내가 6·25 전쟁 이후보다 더 좋아진 것일까? 좀 더 거시적으로 시야를 넓혀보면, 우리의 자주국방 역량은 고려시대보다 나아졌을까? 국민의 심성은 조선시대보다 너그럽고 평화로운가? 문화적 다양성은 삼국시대보다 나아졌을까?

 

여기서 시야를 나라 밖으로 돌려보자. 멀리 갈 것도 없이 같은 한자문화권이자 유교문화권인 이웃 몇 나라만 보더라도 우리가 그렇게 으스대고 뽐낼 건 없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가령 우리는 중국보다 문화적 자주성을 지니고 있는 걸까? 적어도 중국은 모든 외래어로 된 개념과 용어를 자국어, 즉 한자로 바꾸어 사용한다. 그러니 서구의 새로운 사상과 기술도 중국화하여 토착화시킨다. 중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옌의 소설들에는 이런 중국식 자주성과 민본주의 전통이 연면하게 이어지고 있다. 작가나 지식인들이 외국 사상과 상품의 수입 대리점이나 소매상 노릇만 하는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지방 소도시의 가정주부들이 삼국유사 읽기 모임을 만들어 공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기가 죽었다. 나카스카 아키라 교수(中塚明, 1929)가 이끄는 시민 여행단이 매년 한국의 동학유적지를 탐방하고 있다. 나카스카 교수의 선배인 야마베 겐타로(中辺健太郞, 19051977)는 소학교 출신의 노동자로서 평생 일본 국회도서관의 고문서를 뒤지며 조선침략사를 연구하였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1947) 일행은 최근 합천의 한국인 피폭자 마을을 방문하여 피폭자 2, 3 세대 피해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였다. 그리고 정신대 문제는 한일 정부가 다시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아베 정부의 군국주의 부활 정책에는 거부감을 느끼지만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의 이러한 문화적 전통과 역량, 철저한 실사구시의 정신에는 존경을 넘어 일종의 경외심을 느끼게 된다.

현재 우리 농촌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베트남과 필리핀,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여성들이다. 또한 우리의 공장과 건설 현장, 염전과 농어촌의 부족한 일손을 메워주는 것도 이들 여러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우리가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라고 깔보는 이 나라들도 어떤 점에서는 우리보다 뛰어난 점들이 많다.

 

가령 베트남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여 민족통일을 이룬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세계적인 작가 바오닌(1952)의 소설 전쟁의 슬픔은 승전국 전사의 영웅적 투쟁을 그리거나 전쟁을 미화하지 않고 전쟁에 휩쓸려 젊은 나이에 죽어간 숱한 젊은이들의 사랑과 고뇌를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당국의 재판 인쇄 금지처분까지 받은 작품이다. 그는 금년 4·3 70주년 문학제에 초청받아 제주도를 방문하였는데 전쟁을 통한 통일은 너무 많은 죽음과 고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진보당 대표 조봉암은 1959년 이승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3. 나의 꿈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런 이의 없이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역사의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우리의 생각과 행동방식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진보적이고 합리적이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은 내일이면 더 안전하고 행복해지는 것일까? 여러분도 언젠가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래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보다는 우리가 밥 굶지 않고 고생 안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편하게 살고 있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생각에 안주하다 보니, 민주주의도 좋지만 그래도 경제발전을 위해 국민총화를 다그치던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우리를 잘 살게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노인들에게 적절하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애를 먹기도 한다.

 

나는 정확히 말해 이런 주장을 하는 노인들과 같은 시기에 같은 환경에서 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이다. 나의 친구와 동창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 요즘 말로 꼰대 세대요, 자칭 산업화세대인데, 나는 우리 세대가 한국사회의 안정과 균형을 잡아주는 밸러스트(바닥 짐?)가 아니라 후손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짐이라는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한탄하면서 과거의 가치관을 젊은 세대에게 강요하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나도 당신 같은 노인이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이 먹고살기 힘든 것은 다 우리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건데 뭘 그렇게 잘했다고 큰소리를 치느냐고 되묻곤 한다. 적극적인 반박과 반론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변명인 셈이다.

 

그래도 나는 노인으로서 몇 가지 꿈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꿈은 김민기의 노래에도 나오듯이 생전에 손자 손을 잡고 금강산이나 백두산 구경을 가는 것이다. 이 꿈이 실현되려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남북한의 화해와 교류가 자유화되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손자가 학원에 가지 않고 할아버지와 함께 놀러갈 수 있는 교육환경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세상이 지금 같은 흐름으로 이어진다면, 둘 다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른 하나의 꿈은 250km, 6백리에 이르는 현재의 비무장지대를 독일처럼 생태보존지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독일은 통일 전의 동서독 국경지대 1500km를 생태보존지역으로 지정하여 이른바 녹색 띠를 만들어낸 바 있다. 한반도의 녹색 띠는 말 그대로 그린벨트처럼 일체 개발을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여 생물다양성 보호를 위해 영구 보존하여야 한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지구는 현재 인간에 의한 6번째 대멸종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 50년간 사라지는 포유류의 생물 다양성을 복원하는데 300~500만년이 걸릴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런 대멸종을 막거나 늦추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든 정치·경제·안보적 가치에 우선하여 한반도 녹색 띠를 영구 보존지역으로 확보하여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나카스카 교수 일행의 동학 유적탐방을 주관하는 일본 후지여행사는 피스, 그린, 휴머니티를 모토로 내걸고 있다고 한다. 영리 추구가 1차적 목표인 여행사가 이런 이상주의적 모토를 내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런 이상적인 모토를 내걸고도 장사가 될 만큼 일본에는 이상주의자들이 제법 있다는 간접증거인 셈이니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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